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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배낭을 비우다

대둔산

by akwoo 2020. 11. 20.

오랜만에

어깨와 골반 그리고 하체에 묵직함이 느껴졌다

22kg의 무게는 내 체중의 3/1을 훌쩍 넘어서

산행에 적합한 무게가 아니다

배낭의 무게가 내 체중과 체력의 한계치를 넘으면

가장 먼저 허리 벨트에 전해오는 무게가 골반으로 전달되면서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다

 

갈수록 나태해지는 육체에 자극을 줄 필요가 있었고

원인 모를 불안감과

일상의 산만함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자양분은 육체다

육체적 고통(운동)을 견디고 나면

그만큼 정신도 건강해진다

 

산행의 시작은 용문골로 잡았다

백패킹은 케이블카를 타고 갈 때가 많은데

묵직한 배낭을 메고 좀 걷기로 했다

 

 

동쪽 능선의 아침 풍경

익숙한 등산로는

가을 가뭄으로 걸음마다 흙먼지가 올라왔고

수북하게 쌓인 갈잎은

밟힐 때마다 바스락 거리며 부서졌다

이 코스는 소나무와 참나무 종류의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는데

활엽수는 이미 잎을 거의 떨구고 빈 몸으로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뻗어간 바위 능선과 저 아래 비티재가 보인다

일요일 오후라 등산객은 많지 않았는데

하산하다 만나는 등산객들이 이 시간에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디로 가는지

자꾸 물어왔다

용문골에서 할머니 집(신선암 아래 절터)까지는 암벽이나 릿지 등반하러 자주 다니는 길이고

완만하게 오르는 곳이라

배낭의 묵직함에도 어렵지 않게 오른다

날씨가 따뜻해서

땀이 비 오듯 했는데 배낭을 내리기 싫어서

할머니 집까지 쉬지 않고 올라갔다

 

 

 

사진 중간에 태고사가 보이고 그 뒤로 진산면이 보인다

시간을 보니 출발해서 35분 소요되었다

배낭을 내리고 플리스 재킷을 벗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는데 낯익은 얼굴이 내려온다

청주에 사는 후배다

등산 가이드 동기이고 뛰어난 암벽등반가인 용철이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동안 못 보다가 4~5년 만에 만났는데

늘 만나는 친구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일행 두 분과 릿지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눈다

살갑게 서로 소식을 전하며 살지는 않지만

이렇게 불쑥 만나는 것도 좋다

만난 기념으로 기념샷을 한컷 하고

헤어졌다

 

 

 

진산쪽 골에서 배티재로 미려드는 안개

할머니 집에서 출발하여 완만한 길을 잠시 걷다가

케이블카 쪽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칠성봉 전망대 방향으로 오르고 있는데

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내가 속한 산악회 '아름다운 동행' 회장을 맡고 있는 기홍이가 아들과 함께 내려오고 있다

아들과 함께 '구조대 길'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란다

요즈음 클럽 산행에 참석하지 못해서

거의 1년 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서로 반가워서 배낭을 내리고 잠시 앉아 수다를 좀 떤다

아들 형진이를 초등학교 때부터 스포츠 클라이밍을 시키더니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선등을 할 정도로 발전했고

클럽 산행 때마다 참석하고 있어서

보기 좋다

 

 

 

탁한 대기 속에 하늘이 조금 붉어 졌다

기홍이와 헤어져 조금 오르니 칠성봉 전망대 입구다

큰 표지판 바로 옆이

십 수년 전 기운이와 함께 개척한 '아름다운 동행길' 릿지 초입이다

등산로는 릿지 오른쪽으로 나 있으며

정상 능선인 용문골 삼거리까지 계단 형태를 올라가야 한다

'아름다운 동행 길' 릿지의 마지막 피치도

용문골 삼거리 바로 옆 암봉이다

용문골 삼거리 능선에 도착하니

소요시간이 1시간 35분 걸렸다

바로 낙조산장 쪽으로 5분 정도 진행하다 동쪽 능선상으로 올라서서

3월에 텐트를 쳤던 바로 아래 암봉에 도착하여

잠시 땀을 식힌 후

소나무 아래 텐트를 쳤다

이곳은 3평 남짓한 암봉 위로

1인용 텐트 1동만 칠 수 있다

날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태고사 쪽 암봉들을 오르는 릿지 등반가들이 거의 등반을 끝내고

능선 위로 올라와 장비 정리를 하는 소리만 어두워지는 능선에 남아있다

 

 

 

텐트 사이트 바로 앞에 있는 소나무

의자에 앉아

바람을 즐긴다

바람은 북동쪽에서

소란스럽지 않게 잊을만하면 찾아와서

잠시의 미련도 없이 능선을 넘어 떠나갔다

어두워진 만큼 사방은 고요해졌고

간간히 부지런한 새만 울부짖는다

저 아래 도로에는 배티재를 넘거나 넘어오는 자동차 불빛이 붉은 궤적을 그렸다가 사라진다

저녁 7시도 되지 않았는데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스토브에 물을 끓여 햇반으로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구운 계란 2개와 사과 반쪽을 후식으로 먹었다

다시 의자에 몸을 묻고

북쪽 방향의 멀리 보이는 대전의 야경과

정동 방향의 금산군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3평의 암봉 위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시간을 아무런 생각 없이 즐긴다

북쪽 하늘 천정 부근에 옆으로 누운 W자 모형의 카시오페이아 자리가 선명하게 빛나고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횡으로 지나는 옅은 가을 은하수가 길게 늘어져 있다

카시오페이아 자리 동쪽으로 안드로메다와 페가수스자리가 있는데

한참을 찾아봤지만 제대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마리아쥬 프레르의 '얼그레이 블루'를 홀짝 거리며

멍하니 별을 바라보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동쪽으로 뻗어 있던 암릉이나 산줄기들이 어둠과 동화되어

암흑의 바다처럼 느껴진다

 

 

 

안개가 조금 더 밀려 들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깊숙이 내려앉는 외로움을

다독여 보지만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바뀌고

이런 느낌이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어머니의 不在가 실감 나서 내내

더 외롭고 그리워졌다

 

 

 

망원으로 당긴 배티재

늦가을 밤은 길다

딱 혼자 누울 수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

렌턴을 켜고

예전에 한 번 읽었던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를 읽는데

글씨가 작아서 흐릿하게 보여

2~3페이지 읽다가 그만뒀다

팩을 박지 못한 텐트 한쪽이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거린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아예 텐트 문을 열고 묶어서 한쪽에 고정시켰다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누워서인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잡념이 일어나 몇 차례를 깨었다 다시 잠들곤 했다

 

 

 

탁한 대기와 구름 사이로 잠깐 해가 비췄다

모닝콜이 울려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산줄기들이 실루엣으로 보였고

사방은 어스름했다

별은 여전히 총총한데

어제 '카시오페이아'가 있던 딱 그 자리에는 북두칠성이 선명했다

(아무래도 천문 공부를 해야겠다)

아침 공기가 선선해서

다시 텐트에 들어가

다운재킷을 챙겨 입고 텐트 밖으로 나오니

잠깐 사이에 날이 조금 밝아졌고 별들이 사라졌다

대기는 여전히 탁했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여명 빛 마저 흐릿했다

실망스러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암릉을 건너 건너편 봉우리로 넘어갔다

사진을 몇 컷 찍었지만

워낙 일기가 좋지 않아서 밋밋하다

다시 텐트가 있는 암봉 바로 뒤에 있는 암봉으로 올라가 사진을 담는다

이 시기에는 이곳이

사진 구성하기가 더 나아 보인다

동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암릉과

암릉 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

그 뒤로 횡으로 흐르는 작은 산줄기가 사진의 구도를 채워준다

 

 

 

 

잠시 해가 들어 안개에 색이 입혀졌다

산 아래 배티재 부근만

안개가 밀려와 있다

망원으로 당겨 그 부분만 클로즈업해서 담아본다

빛이 없어서 흑백톤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구름 사이로 잠시 태양광선이 그곳을 비출 때만 안개가 탁한 핑크색을 띠곤 했다

특별함이 없으니

사진 촬영은 금방 끝났다

 

프라이팬에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사과를 깎아 여유 있는 아침 식사를 즐긴다

날씨가 따뜻해서

서두를 것이 없고

여전히 산은 고요하다

어쩌다 까마귀 몇 마리가 비행을 하였지만

봄이나 여름과는 다르게 새 울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종종 수분이 다 빠져 가벼워진 나뭇잎이

새가 날듯 바람에 실려 비행을 하다 계곡 어디론가 사라진다

화려했을 단풍은 이미 다 져서 우중충한 날씨와 어우러진 산의 풍경은

침울해 보인다

암릉이나 바위 절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멋스러운 모습으로 군데군데 서 있지만

나는 잎을 다 떨구어낸 활엽수에 감정이입이 된다

비움과 채움의 반복을 통해

생존을 이어가고

진화하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활엽수에서

갈등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수행가의 삶이 보인다

 

 

 

가마귀 한마리가 멋진 비행을 한다

2020-11-15~16 전북 대둔산

 

 

6시에 일어나 금세

4시간이 훌쩍 지났다

주섬주섬 텐트를 걷고 주변을 정리하여 배낭을 꾸렸다

2리터의 물과 두 끼분의 식량을 소비했으니 배낭의 무게도 3kg 정도 줄었다

내리막 길이니 1시간이면 충분하다

월요일이라 등산객이 없어 호젓한 길이다

 

나이가 숫자가 커진다는 것은

내 한계치가 그만큼 낮아진다는 것이다

육체의 절정기는 아주 오래전에 정점을 찍고 이미 한참을 내려와 있다

그렇다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한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육체에 자극을 주고

가끔은 내 한계치를 실험해봐야 한다

그리고

한계라고 여겼던 지점을 조금씩이라도 넘어 보면서

여전히 해야 할 것이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짧은 시간 산을 오르고 머물렀다

특별한 상황도

어려움도 고통도 없는 편안한 산행이다

어떤 영감을 얻지도 못했고

상상력을 자극하지도 못했다

좀 더 외로워지고 싶었고

조금 더 그리워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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