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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배낭을 비우다

대둔산

by akwoo 2016. 6. 12.







짐은 무겁고 바위는 미끄러웠다

RCB등반(릿지등반과 백패킹을 같이 하는 등반)의 관건은

패킹에 있다

비박장비를 포함한 벽등반 장비를 같이 준비해야 하고

최소한 세끼의 식량을 패킹해야하니

아무리 짐을 줄여도 무게가 만만치 않다


어쩌다 보니 올해 첫바위다

일행이 가져온 짐은 완벽한 백패킹 짐이다

세끼의 식사 뿐 아니라

복분자주 대병 1개와 소주 1병

토마토와 참외, 오이

고기, 반찬 등등

이 짐을 지고 릿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등반을 안 할 수는 없다

 첫 피치 배낭을 매고

어렵게 선등을 마쳤다

후등자가 올라오며 미끄럽다고 소란스럽다

거기에 소나기가 내렸다

두명의 후등자가 연속 추락을 먹었다

짐도 문제고

비로인해 바위도 미끄러워

등반을 포기하고 백패킹 포인트로 올라

일찌감치 타프를 설치하고 자리를 잡았다

고기를 굽고

복분자주가 알파인 스타일로 돌았다


다들 비를 기다린다

이런 날은 비가 제격이다

절벽 위에서

바윗길을 내려다보며

눅눅한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간간히 북서풍이 불어

커피향이 흐터졌다

늘  저녁에 도착하여 차 한잔 마시고

잠들던 것과 달리 낮 시간부터 여유가 있으니

이 또한 나름 즐겁다


날이 어두워지고

취기가 오른 친구가

"너무 힘들어서

늘 지금 죽더라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 말에 문득 어떤 친구 하나가 오버랩되었다

왜 그렇게 사느냐는 물음에

그렇게라도 견디어야 살 수 있었다고 했었다

그 친구는 지금

조금은 변화된 삶을 살고 있을까?

좀 더 완벽한 변명을 찾아내고

여전히 자신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다고 말하며 살까.

그렇게라도.....


이 친구는 대둔산 구조대 릿지에서

등반 중 추락을 하면서

그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끼고

자신이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후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그래서 산이

등반이

늘 새롭고 기대되는 삶이라고 한다

가식도 건방도 없는 친구다

스스로에 정직하니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이리라

쉬운 삶이란 없다

누구나

깊고 아픈 상처 한 둘 감추고 산다

그 상처라는 것이

변명이되어서는 안된다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북서풍에 의하여

깊은 안개가 밀려왔다

잠시 거쳤다

하늘에 반달과 별이

선명하게 빛나더니

금새 구름에 가려졌다


잠자리에 들었다

막 잠들려고 하는 순간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다

비가 타프 안으로 스며들고

타프가 요동을 쳤다

타프를 낮춰 비를 조금 막아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다

타프를 타고 흘러내린 비가

바닥으로 스며들어 종이컵으로 물을 퍼내고

잠들었다


빗속에서 깊이 잠들었던지

아침에야 깼다

산 아래는 안개가 깊이 깔렸있다

잠시 바위 위에 서서 아침을 즐긴다

가라앉은 대기의 기운이

온 산을 누르고 있어

차분하다


일행이 아침밥을 해준다

오랜만의 호사다

얼마남지 않은 물로 커피를 내렸다

커피향이 아주 느리게

산 주위를 맴돈다

시간도 느리고

바람도 느리다


느리게

느리게 짐을 꾸려

산을 내려온다


계획은

첫 날

클라이밍과

다음 날 백클라이밍을 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등반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도

산에 있어서 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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