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두렵지만 때로 그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더 큰 두려움을 차단해주기도 한다.―
등반은 새벽 3시에 시작되었다.
밤새 두통과 어지럼증으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1시경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했지만
음식은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등반을 위해서는 뭐든 먹어야한다.
억지로 누룽지를 먹고 장비를 챙겨 어둠속으로 출발했다.
랜턴을 켜고 1시간정도 걸어서 드디어 만년설에 진입했다.
크램폰을 착용하고 얼음을 찍어보니 크램폰의 날카로운 발톱이
얼어붙은 눈을 깊지도 옅지도 않게 파고들어가는 느낌이
발끝에서 척추를 건너 머리까지 찌르르 전해왔다.
6시가 넘어서자 체르코리 뒤로 랑탕리룽이 여명 속에서 솟아올랐다.
랑탕리룽을 뒤로하고 설사면을 건너는데 낙석들이 많이 보였다.
기온이 올라가면 얼어있던 돌이나 쌓여있던 눈들의 결집이 느슨해지면서
낙석이나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데 그래서 정상공격은 대부분 새벽녘에 시도한다.
새벽공기에서는 쇳가루 냄새가 났다.
쇳가루 냄새가 난다는 것은 공기가 몹시 차갑고 고소적응이 잘 안되었을 때 느끼는 나만의 냄새이다.
바라클로바로 얼굴을 가렸지만 쇳가루 냄새가 계속 허파를 깊숙이 찔러 늑골주변이 먹먹해졌다.
새벽 6시30분 고소증상이 심해졌다.
1년에 수차례씩 히말라야등반을 하는 전문등반가에게는 이미 고소적응이 되어있겠지만
에베레스트원정 같은 고산원정경험이 많아도 몇 년 만에 고산을 등반하는 경우
고소적응 없이는 5천 미터 급도 쉽지 않은 것이 고산등반이다.
얄라피크는 멀리서 본 것과 달리 거대한 빙하 뒤편에 서있었다.
자료수집 때 인터넷에 얄라피크 정상사진이라고 떠돌던 사진은 아마 이 설원에서 담은 사진일 것이다.
고정로프가 필요하지 않다는 현지정보만 믿고 우리는 고정로프도 준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크레바스가 또아리를 틀고 있고 세락이 가로막고 있다.
크레바스나 세락을 피해 등반을 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몰랐다.
그렇다고 30m 보조자일 하나로 세락을 넘어서고 크레바스를 건너는 것도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셰르파들은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체력만 되면 가능하다고 우겼지만 사실은 그들 또한 얄라피크는 처음일 것이었다.
본격적인 빙하지대에 들어서서 3시간을 걸었다.
고도 5,200m, 더 오르면 오늘 중 하산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어 여기서 등반을 끝내기로 했다.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오전10시가 되어있었다.
가지고간 클럽 기를 꺼내 멀리 얄라피크 정상을 뒤로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산은 다시 BC로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고소증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 머릿속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치료법은 빨리 고도를 낮추는 것 외에는 없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미 위험지역을 벗어난 하산에는 여유가 생겼다.
오를 때 보지 못했던 설산의 여러 모습들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보는 그 힘들었던 체르코리는 캉첸포, 나야캉가의 기세에 눌려 납작 엎드려있었다.
오후 1시가 되어서 BC에 도착하여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했다.
이곳부터의 하산은 체르코리를 넘지 않고 포터들이 온 길인 산허리를 따라 나선형으로 내려갔다
체르코리는 산전체가 커다란 목장이다.
나무 하나 없는 목초로. 산 중간 중간에 야크막사가 있다.
그 큰 산 구석구석 야크가 풀을 뜯으며 횡으로 낸 길이 끝없이 계단을 만들었고
그 모습은 촘촘히 짜여진 털스웨터 같아 보였다.
지금이 봄 시즌 이었다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목장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야크와 야크를 모는 목동의 여유로운 모습,
형형색색의 야생화와 만년설이 덮여있는 랑탕리룽과 캉첸포, 얄라피크,
그리고 하늘과 구름, 바람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경은
전설속의 이상향인 샹그리나(Shangan-la)의 모습일 것이다.
지친 육신과 여유로운 마음,
이 부조화는 하산을 더디게 했다.
쉬고 또 쉬면서 걸으니 6시가 되어서야 캉친콤파에 도착했다.
롯지의 난로 가에 앉아 따뜻한 물을 먹고 지친 몸을 위로해주는 것으로 이틀간의 도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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